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도 막부 (문단 편집) == 통치 체제 == 에도 막부는 금교령(禁教令)을 시행하여 일본 내에서 [[불교]], [[신토]]와 마찰을 빚을 것을 우려한 [[기독교]]를 금지하고, [[데지마]]의 네덜란드 선박 외 모든 서양 선박의 입항 또한 금지했다. 그리고 각 [[번(제후국)|번]]들이 막부의 허가 없이 외국과 교류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이른바 [[쇄국]]을 시행하여 내부 통제를 강화하고 [[막부#s-3]]의 수장인 [[정이대장군]]과 번의 수장인 [[다이묘]]들 간의 [[봉건제]]적인 주종관계인 막번체제(幕藩体制)를 바탕으로 무사([[사무라이]])계급의 통치를 안정화했다. 또한 도쿠가와 쇼군가의 직계 가문인 [[고산케]](御三家)를 각각 일본의 주요 도시 교토, 에도, 오사카 근방의 요충지인 [[오와리 번]], [[미토 번]], [[기슈 번]]의 번주로 삼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지방 다이묘들의 반란으로부터 막부체제를 수호하는 역할을 할 수 있도록 했으며 후다이 다이묘, [[도자마 다이묘]] 등 막부에 대한 충성도에 따라 영주들 간의 서열을 분류하고 [[개역]](改易)[*かいえき 번주의 영지를 몰수하는 것.], [[참근교대]](參勤交代)[*さんきんこうたい 1년에 1번 씩 영지와 에도를 번갈아 오가며 거주하는 것.] 등 강력한 [[다이묘]](大名) 통제 정책으로 성공적인 지방 통제를 수행하였다. 또한 이를 유지하기 위해 유교적 질서 체제 하에서 엄격한 사농공상의 신분제를 일본사에서 처음으로 구현했으며, 일본 전체의 1/4 과 주요 도시, 화폐 발행 등을 막부가 통제하고, 5~6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이러한 체제에서 나오는 권력을 [[봉행]]을 통해 행사하였다. 참근교대에 의해 촉발되어 전국 단위로 발달한 상업 또한 뒷날 자본주의가 번성하는 발판이 되었다. 그렇기에 일본사 기준으로는 중앙정부의 권력이 다른 막부에 비해 막강하였다. 중기 이후로는 [[정이대장군]]들의 능력이 초기에 비해 부족하였고 본가의 혈통이 단절되다 보니 그 휘하의 로주(老衆)에게 실권이 쏠리고 쇼군은 다소 상징적인 존재로 물러나게 된다. 이런 점은 상대적으로 더 심하긴 하나 [[호조씨|호조 가문]]의 [[싯켄]]에게 실권이 몰렸던 [[가마쿠라 막부]]와 비슷한 점도 있다. 다만 에도 막부는 특정 가문에게 실권이 넘어가지는 않았다. 로주의 힘이 강해진 것도 실무 대행의 성격이 강하다. 주로 로주를 맡은 후다이 다이묘들은 영지 자체가 10만 석 미만으로 작은 편이라 개인의 힘은 강하지 않았고, 막나간다면 쇼군이나 다른 후다이 가문들의 견제로 본인이든 다음 대에서든 그 대가를 치르곤 했다. 영지가 큰 신판 다이묘들이나 도자마 다이묘들은 아예 중앙정치 참여가 제한되어 있었다. 쇼군의 권력 자체가 흔들리는 일은 [[흑선내항]] 후 막부 말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타났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